경상흑자 역대 최대|원화만 계속 약해지는 이유
흑자가 쌓이는데 환율은 오른다
올해 들어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역대 최대 수준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수출로 벌어들이는 달러는 넘쳐납니다. 그런데 17일 원·달러 환율은 1483.5원까지 올랐습니다. 경상수지가 1%포인트 늘어날 때 환율이 오히려 0.65% 상승했다는 한국은행의 분석이 나왔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공식과 정반대입니다.
통상적으로 경상수지 흑자가 커지면 달러 공급이 늘고 원화 가치는 오릅니다. 이 공식은 수십 년간 외환시장의 기준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날 하나증권은 코스피 하락을 보도하면서 "외국인 배당금 역송금 수요"를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삼성전자 배당금 지급일에 맞춰 약 22억 달러 규모의 달러 환전 수요가 한꺼번에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의 수급 이벤트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한국은행은 더 근본적인 원인을 짚었습니다. 가계와 기업이 해외에 투자하는 달러 자산이 구조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학개미로 대표되는 개인투자자들의 해외 주식 매수, 연기금의 글로벌 포트폴리오 분산이 가속화되면서 수출로 번 달러가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해외로 다시 나가고 있습니다. 한은이 "경상흑자의 환율 하락 효과가 민간의 달러 자산 확대로 상쇄되고 있다"고 밝힌 배경입니다.
수출 흑자가 환율을 못 잡는 구조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달러가 한국 경제를 드나드는 경로를 살펴야 합니다. 수출업체가 달러를 벌어서 원화로 환전하면 원화 수요가 생깁니다. 이것이 환율을 내리는 전통적 경로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출업체가 달러를 벌자마자 해외 법인 자금으로 쓰거나, 달러 채권에 재투자하는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개인 투자자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은이 분석한 결과, 민간의 해외 달러 자산 보유 규모가 빠르게 확대되는 국면에서는 경상흑자가 늘어도 환율이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가 다시 해외로 빠져나가는 '달러 재수출' 구조가 고착화됩니다. 이날 한 언론이 "수출로 버는 달러 역대 최대라는데 원화 가치는 왜 자꾸 떨어질까"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습니다.
여기에 오늘 특수 요인이 겹쳤습니다. 삼성전자 배당금 지급일이었습니다. 국내 상장사 전체로 보면 4월은 외국인 배당금 역송금이 집중되는 시즌입니다. 22억 달러가 하루에 역송금으로 빠져나가는 수준은 단기적으로 원화 약세 압력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합니다. KB국민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하루에 상당한 규모의 배당금 지급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단기적으로 환율 상방 변동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설의 핵심은 배당 시즌 이후에도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학개미의 해외 투자 규모는 2020년 이후 매년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연기금의 해외 자산 비중도 지속적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흑자로 번 달러가 국내에 머물지 않는 한, 경상흑자가 환율을 내리는 힘은 앞으로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역설이 언제 끝나는가
이 흐름이 유지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지속돼야 합니다. 첫째, 해외 자산에 대한 한국 투자자들의 수요가 꺾이지 않아야 합니다. 미국 증시가 강세를 유지하고 달러가 강세를 이어가는 한 서학개미의 달러 매수 유인은 유지됩니다. 둘째, 외국인 배당금 역송금 수요가 계속 반복돼야 합니다. 한국 기업의 이익이 늘어나고 배당 규모가 커질수록 이 계절적 요인의 강도도 세집니다.
반대로 이 역설이 깨지는 조건도 있습니다. 달러 약세 전환, 또는 미국 자산 수익률 하락이 서학개미의 환전 수요를 줄일 수 있습니다. 종전 협상이 타결되고 중동 리스크가 해소되면 안전자산 선호가 약해지고 원화 복원력이 일시적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미국과 이란의 2차 협상이 이번 주말 열릴 것으로 시사된 가운데, 협상 타결 여부는 단기 환율에도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증거의 무게를 따지면, 현재로서는 역설이 지속되는 쪽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구조적 흐름인 해외 투자 확대는 협상 결과 하나로 반전되지 않습니다. 다만 주목할 수치가 있습니다. 환율 1500원 선입니다. 이 선을 넘으면 수출업체의 네고(달러 매도) 물량이 대거 유입돼 상단을 막는 경향이 있습니다. 1483원에서 1500원까지의 거리는 16.5원. 이 선이 유지되면 역설은 지속되지만 극단적 약세는 제한됩니다. 만약 1500원이 깨지면 자본 흐름에 대한 정책 개입 여부가 새로운 변수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