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컴 쇼크 반도체|외국인 120조 이탈 끝?
반도체 고점론 충격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가 오늘 각각 6.4%, 9.9% 급락했습니다. 젠슨 황이 한국에 도착한 바로 그 날, 한국 반도체 대장주들이 '검은 금요일'을 맞았습니다. 시장의 논리를 뒤집어놓은 것은 브로드컴의 실적발표였습니다. 매출 자체는 기대치를 웃돌았지만, 연간 AI 반도체 매출 가이던스를 상향하지 않았습니다. AI 성장이 당초 예상보다 완만할 수 있다는 신호로 시장이 읽었고, 브로드컴 주가는 12% 넘게 급락했습니다.
문제는 이 충격이 단순한 브로드컴 개별 이슈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이크론이 8% 급락하고 Arm이 4% 이상 빠지면서 미국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코스피는 장 초반 6% 넘게 빠지며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됐고, 장중 8038까지 밀렸다가 8160에 마감했습니다. 올해 코스피가 9000선을 바라보던 고점 대비 낙폭은 하루 만에 700포인트를 넘어섰습니다.
그런데 낙폭의 크기가 브로드컴 가이던스 하나로 설명되기엔 과도합니다. 외국인은 오늘 유가증권시장에서만 3조5000억 원을 순매도했고, 기관도 9400억을 팔았습니다. 개인이 4조2000억을 홀로 받아냈지만 지수는 결국 5.5% 하락 마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브로드컴 충격이 방아쇠였다면, 총알은 이미 장전돼 있었다는 점입니다. 외국인은 5월 7일 코스피 7000선 돌파 직후부터 20거래일 연속 순매도 중이었고, 올해 누적 순매도 규모는 이미 120조 원을 넘어선 상태였습니다.
환율 17년 최고
반도체 급락이 남긴 진짜 질문은 주가가 얼마나 빠졌느냐가 아닙니다. 빠져나가는 외국인 자금이 어디로 향하느냐입니다. 주식을 판 외국인은 원화를 달러로 전환해야 하고, 이 달러 매수 수요가 외환시장을 직격했습니다.
오늘 원달러 환율은 장중 1550.1원까지 치솟았습니다. 2009년 3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7년 3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종가는 1539.1원으로 이틀 연속 급등이었습니다. 경상수지는 1~4월 누적 1026억 달러 흑자로 역대 두 번째 수준이었는데도 환율이 올랐습니다. 수출기업 달러 네고 물량보다 외국인 달러 환전 수요가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환율 급등은 즉각 채권시장을 건드렸습니다. 은행채 5년물 금리가 4.369%로 2023년 8월 이후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수입물가 상승을 통해 소비자물가가 3.1%까지 올라선 상황에서 한국은행이 하반기 기준금리 인상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고, 시장은 7월 또는 8월 연속 인상 시나리오까지 반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계부채 1865조 원 위에서 대출금리가 0.25%포인트 오를 때마다 전체 이자 부담은 3조2000억씩 늘어납니다.
그러나 환율이 단순히 외국인 주식 매도만으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브렌트유가 배럴당 110달러 선을 재돌파하고 미국과 이란 간 종전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구조적 약점이 다시 부각됐습니다. 하나증권 이코노미스트 전규연은 외국인 보유 한국 주식 평가액이 올해만 1304조에서 2918조로 두 배 넘게 불어난 만큼 리밸런싱 성격의 매도라고 분석했습니다. 그 리밸런싱이 완료되기 전까지 달러 전환 수요는 구조적으로 유지됩니다.
은행주 역방향
오늘 코스피가 5% 넘게 빠지는 동안 오히려 오른 업종이 있었습니다. 은행주입니다. 신한지주가 7% 넘게 급등했고, KB금융이 4.6%, 하나금융이 3.1% 올랐습니다. 급락장 한가운데서 역방향 수급이 발생한 것은 전날 금융감독원의 결정 때문입니다.
금감원은 홍콩H지수 ELS 불완전판매 은행 5곳에 대한 과징금을 당초 1조4000억 원에서 6000억 원 수준으로 경감 의결했습니다. 당초 4조 원대까지 거론됐던 것과 비교하면 3분의 1 이하 수준입니다. 주요 은행들은 이미 지난해 4분기와 올해 1분기에 ELS 과징금 충당부채를 적립해놨기 때문에, 이번 경감 결정은 추가 자본 충격 없이 리스크가 닫힌다는 의미였습니다.
여기서 수급이 갈렸습니다. 반도체 외국인 매도로 코스피가 무너지는 가운데, 국내 기관 일부는 방어주 성격의 은행주로 자금을 이동시켰습니다. DB증권 연구원 나민욱은 하반기 기준금리 인상 시 NIM 개선 효과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환율 상승이 불러온 금리 인상 압력이 반도체주에는 악재이지만, 은행주에는 이자수익 확대 기대로 전환된 것입니다.
다만 이 역방향 수급이 지속될 조건은 제한적입니다. 환율이 1550원 위에서 고착화될 경우, 은행 자본비율 관리 부담이 다시 부상합니다. 달러 대비 원화 약세가 지속되면 외화 위험가중자산이 늘어 BIS 비율이 압박받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의 은행주 강세가 구조적 전환인지, 반도체 급락 속 단기 피난처인지를 가르는 변수는 하나입니다. 환율이 1530원 아래로 되돌아오는지 여부입니다. 외국인 리밸런싱 매도가 진정되지 않는 한 그 조건은 충족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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