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사상 최고치|외국인이 돌아온 진짜 이유
전쟁 딛고 최고치
개인 투자자들이 10조 원을 팔아치운 날, 코스피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4월 21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72% 오른 6388.47에 장을 마쳤습니다. 종가 기준 사상 최고치입니다. 이란과의 전쟁이 현재진행형인 상황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고 WTI가 7% 급등한 그 주에, 한국 주식시장은 오히려 파죽지세로 달렸습니다.
이 역설의 핵심은 수급에 있습니다. 외국인이 코스피 현물에서만 1조 3000억 원을 순매수했습니다. 기관도 7000억 원 이상을 사들였습니다. 개인이 10조 원 넘게 차익실현에 나섰지만 지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외국인과 기관이 그 물량을 고스란히 받아냈기 때문입니다.
왜 이 시점에 외국인이 돌아왔을까요. 시장은 두 가지 신호를 동시에 읽었습니다. 하나는 미국과 이란의 2차 협상 기대감입니다. 파키스탄이 중재에 나서면서 협상단 파견 가능성이 커졌고, 달러화가 약세를 보이면서 원화 강세 압력이 생겼습니다. 원달러 환율은 이날 8.7원 내린 1468원에 마감했습니다. 한 달여 만에 1460원대 진입입니다. 환율이 떨어지면 외국인 입장에서는 원화 자산의 달러 환산 수익률이 올라갑니다. 매수 유인이 생기는 구조입니다.
다른 하나는 밸류에이션입니다. 코스피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음에도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7.47배에 불과합니다. 과거 20년 평균과 비교하면 하위 1% 수준의 극단적 저평가 구간입니다. 골드만삭스는 코스피 목표를 7000에서 8000으로, JP모건은 7500에서 8500으로 올려잡았습니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코스피를 저가 매수 기회로 보는 시각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시총도 처음으로 5200조 원을 넘었습니다. 이 수준에서도 지수 상방이 열려 있다는 판단이 외국인 매수세를 지속시키고 있습니다.
하이닉스 40조 시대
그 외국인 매수의 가장 큰 표적은 SK하이닉스였습니다.
SK하이닉스는 이날 장중 처음으로 120만 원을 돌파했습니다. 3거래일 연속 신고가 경신입니다. 시가총액 순위는 두 계단 뛰어 세계 19위에 올랐습니다.
배경은 오는 23일 공개될 1분기 실적 기대감입니다. 증권가는 SK하이닉스의 1분기 영업이익을 37조~40조 원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삼성증권은 40조 2000억 원, 영업이익률 74.9%를 예상했습니다. 창사 이래 최대 실적입니다.
이 수익성의 구조적 근거가 중요합니다. 삼성증권 분석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1분기 서버 D램 가격을 95% 인상했고, 혼합 평균판매가격이 60% 상승했습니다. 핵심은 수요의 가격 탄력성이 낮아졌다는 점입니다. 과거 모바일·PC 고객과 달리, 클라우드 서비스 사업자는 메모리를 단순 재료비가 아닌 장기 투자자산으로 취급합니다. AI 인프라 구축 경쟁에서 메모리를 늦게 확보하면 시장 선점 기회를 잃기 때문입니다. 가격이 올라도 수요가 줄지 않는 구조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 판단이 증권가 목표주가 줄상향의 배경입니다. KB증권 190만 원, IBK투자증권 180만 원, SK증권 200만 원을 제시했습니다. 이달 들어 목표주가를 올린 증권사만 10곳을 넘겼습니다.
연간 전망도 가파릅니다. 삼성증권은 2026년 연간 영업이익 205조 원, 2027년 232조 원을 추정했습니다. ADR 상장 계획 구체화와 자사주 매입·소각 기대감까지 더해지면서 수급 모멘텀이 2분기 이후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삼성전자도 2% 이상 올랐습니다. 신한투자증권은 삼성전자의 2분기 영업이익을 89조 원으로 전망하며 낸드 실적이 시장에서 과소평가됐다는 분석을 내놨습니다.
캐즘 탈출 신호탄
반도체가 이날 시장을 이끌었다면, 2차전지는 시장을 놀라게 했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이 11%, 삼성SDI가 20% 가까이 급등했습니다. 에코프로와 에코프로비엠도 5% 안팎 동반 강세를 보였습니다. 2차전지 전체 섹터가 일제히 불기둥을 올린 배경은 벤츠발 계약 소식이었습니다.
삼성SDI는 메르세데스-벤츠와 차세대 전기차용 고성능 각형 배터리 공급 다년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벤츠의 LFP 배터리 공급업체로 공식 선정됐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업계에서는 양사의 수주 합산 규모가 30조 원을 웃도는 수준이라는 추정이 나왔습니다. 삼성SDI는 이로써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등 독일 3대 프리미엄 완성차 브랜드를 모두 고객으로 확보하게 됐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계약이 시장에 전달한 구조적 메시지입니다. 교보증권은 "고유가가 지속되면서 전기차 선호도가 상승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호르무즈 봉쇄로 유가가 배럴당 90달러에 육박하면서, 내연기관차 유지 비용에 부담을 느낀 소비자들이 전기차로 눈을 돌리는 수요 전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3월 미국·중국 전기차 판매량이 1~2월보다 견조하게 나온 것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ESS 수요도 맞물렸습니다. 미래에셋증권은 "중동 사태로 신재생에너지 전환 수요가 가속화되면서 ESS 가치사슬 전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삼성SDI의 미국 누적 유틸리티용 ESS 설치량은 전년 동기 대비 119% 성장했습니다.
전력 인프라 테마도 동반 강세를 보였습니다. LS일렉트릭은 1분기 영업이익 1266억 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45% 성장했습니다. 북미 매출이 80% 급증했고 해외 수출이 처음으로 국내 매출을 넘어섰습니다.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배터리와 전력기기 모두를 동시에 끌어올리는 구조입니다.
이제 관건은 두 가지입니다. 미·이란 2차 협상이 합의로 이어질 경우 유가가 하락 전환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고유가에 기댄 전기차 수요 전환 논리는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벤츠 다년 계약이라는 수주 자체는 협상 결과와 무관하게 확정된 물량입니다. ESS 수요 역시 유가가 아닌 데이터센터 투자 사이클에 기반한 구조적 수요입니다.
현재까지의 근거를 종합하면 2차전지 반등의 지속 가능성에 무게가 실립니다. 다만 이 판단은 미·이란 협상이 부분 타결에 그치거나 교착 상태가 이어질 때만 유효합니다. 협상이 완전 타결되어 유가가 배럴당 70달러 이하로 급락한다면 전기차 수요 전환 논리가 약화되면서 단기 차익실현 매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검증 시점은 이번 주 목요일 SK하이닉스 실적 발표입니다. 영업이익이 40조 원에 부합하거나 초과한다면 반도체 랠리는 실적으로 확인되고 2차전지와 전력주까지 실적장세 기대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실적이 컨센서스를 하회한다면 하이닉스가 끌어올린 코스피 전체에 되돌림 압력이 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