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6700 돌파|이란發 철강 쇼크의 역설
이란發 철강 급등
전쟁이 증시를 무너뜨린다는 공식이 오늘 깨졌습니다. 미국과 이란의 종전 협상이 다시 교착에 빠진 바로 그 아침, 한국 철강주들이 무더기 상한가를 기록했습니다. 포스코스틸리온과 아주스틸은 각각 30% 가까이 치솟았고, 포스코홀딩스도 12%대 강세를 보였습니다.
역설의 출발점은 이란 정부의 한 가지 결정이었습니다. 이란은 미국·이스라엘과의 갈등이 격화되자 5월 말까지 철강 슬래브와 철판의 수출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내수 공급을 우선 보호하겠다는 조치였지만, 시장은 전혀 다른 신호로 읽었습니다. 글로벌 철강 반제품 공급에서 이란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 만큼, 한국 철강 기업들의 반사 수혜 기대가 즉각 반영된 것입니다.
협상 교착 자체도 철강 테마를 자극했습니다. 이란의 아라그치 외무장관은 러시아 푸틴과 회담하며 3단계 합의안을 제시했습니다. 1단계 공격 중단, 2단계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 3단계 핵 협상이라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즉각 거부하지는 않으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유지했고, 루비오 국무장관은 이란이 시간을 벌려 한다고 직접 비판했습니다. 협상이 장기화될수록 이란산 철강 공급 공백이 길어진다는 계산이 매수세로 이어진 셈입니다.
이란산 유조선이 미군 봉쇄선을 실제로 돌파한 사실도 시장의 계산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24일 원유 약 400만 배럴을 실은 유조선 2척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인도양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봉쇄가 완벽하다는 미군의 설명과 달리 실제로는 균열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는 전쟁이 단기에 끝날 수도, 예상보다 길어질 수도 있다는 양방향 불확실성을 모두 높였습니다. 철강주 급등은 그 불확실성에 베팅한 결과입니다.
코스피 6700 최초 돌파
철강주가 지정학 리스크에 베팅하는 동안, 시장의 주류는 전혀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습니다. 코스피는 이날 사상 최초로 장중 6700선을 돌파했고, 종가는 6641.02로 이틀 연속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중동 불확실성으로 일본 닛케이가 0.34%, 호주 ASX가 0.54% 하락하는 동안 코스피만 나홀로 상승한 것입니다.
이 상승의 핵심에는 SK하이닉스가 있었습니다. 전날 뉴욕 시장에서 마이크론이 5.6%, 샌디스크가 8.1% 급등하며 메모리 랠리가 점화됐습니다. 빅테크 기업들의 1분기 실적 발표를 앞두고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예상을 크게 웃돌 것이라는 기대가 확산된 영향이었습니다. 이 흐름이 한국 시장으로 그대로 이어지면서 SK하이닉스는 130만원대를 재탈환했고, 현대차는 로봇 모멘텀까지 더해지며 6% 가까이 치솟았습니다.
수급 구조는 특이했습니다. 외국인이 매도로 전환한 날에도 지수는 올랐습니다. 기관이 4400억원 이상을 순매수하며 외국인 매도를 상쇄했고, 개인도 7000억원대 순매수로 가세했습니다. 외국인이 17조원을 팔아치우는 동안 기관과 개인이 받아낸 구조가 이미 수주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 8위로 올라섰으며, 외국인 보유 시총은 사상 최초로 2000조원을 넘어섰습니다.
다만 코스닥은 코스피와 다른 그림을 그렸습니다. 코스닥은 이날 1%대 하락으로 마감했습니다. 에이비엘바이오가 임상 핵심 지표 미충족으로 22% 급락하며 바이오 업종 전반에 충격을 줬습니다. 코스피와 코스닥의 분화는 현재 랠리가 반도체·자동차·전력기기 등 대형주 중심의 구조적 순환임을 보여줍니다.
AI 전력기기 초호황
코스피를 6700으로 밀어올린 힘은 반도체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날 전력기기 기업들이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신고가를 경신하고 있었습니다. 효성중공업은 400만원을 돌파하며 6거래일 연속 상승했고, LS일렉트릭은 8.8% 급등하며 연속 신고가를 썼습니다.
원인은 숫자에서 확인됩니다. 효성중공업의 올해 1분기 수주 규모는 4조 2000억원으로, 통상적인 분기 최대치인 2조 2000억원의 두 배에 달했습니다. 빅테크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를 적극 확장하면서 초고압 변압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결과입니다. 미국의 노후 전력망 교체 시기가 맞물리면서 공급 부족은 단기간 해소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LS일렉트릭 역시 초고압변압기와 배전반을 동시에 확대하며 고부가가치 물량 중심으로 수주 잔고를 쌓고 있습니다.
반도체와 전력기기는 서로 다른 종목처럼 보이지만 같은 인과관계에 묶여 있습니다. AI 데이터센터를 짓기 위해서는 고대역폭 메모리(HBM)가 필요하고, 그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초고압 변압기가 필요합니다. 반도체 수요가 오를수록 전력기기 수요도 함께 오르는 구조입니다. 삼성SDI의 ESS 배터리 사업이 AI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른 수요 증가를 실적 개선의 배경으로 직접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현재까지의 근거를 종합하면 이 흐름이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이 판단은 두 가지 조건이 유지될 때만 유효합니다. 첫째, 빅테크 기업들의 이번 주 실적 발표에서 AI 투자 가이던스가 예상을 하회하지 않아야 합니다. 메타,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의 실적 발표가 이번 주에 집중되어 있으며, 단 한 곳의 데이터센터 투자 축소 신호도 반도체와 전력기기 전반을 동시에 흔들 수 있습니다. 둘째, 미·이란 협상이 급격히 타결 국면으로 전환되지 않아야 합니다. 종전이 가시화되면 철강주는 단기 조정을, 에너지 관련 인플레이션 우려 완화로 연준의 금리 인하 기대가 높아지면서 성장주에는 오히려 호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내일 확인해야 할 기준점은 두 가지입니다. 빅테크 실적 발표에서 AI 자본지출 전망이 유지되는지, 그리고 원·달러 환율이 1470원대를 지지선으로 유지하는지입니다. 만약 빅테크 실적이 기대를 밑돌고 환율이 1490원대로 재반등한다면, 지금의 코스피 랠리는 단기 과열의 영역에 진입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