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F 400조 돌파|공매도 실탄도 최대

· KRX

400조의 두 얼굴

오늘 코스피가 48일 만에 6200선을 탈환했습니다. 외국인과 기관이 합산 1조 원 넘게 순매수하며 지수를 2.21%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같은 날, 국내 ETF 순자산이 처음으로 400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지난 100여 일 만에 100조 원이 늘어난 숫자입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15일 기준 ETF 순자산총액은 404조 503억 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전날 대비 하루 만에 약 6조 원이 늘어난 규모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축제 분위기입니다. 반도체 호황, 중동 전쟁 충격 회복, 연금 자금 유입, 개미의 ETF 전환까지 모든 스토리가 400조 시대 개막을 향해 수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삼성전자는 사상 최고가까지 500원 차이로 다가섰고, SK하이닉스는 5거래일 연속 상승하며 신고가를 경신했습니다. 블랙록은 이날 보고서를 통해 한국 증시에 대한 비중 확대 의견을 공식 발표하며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기술 공급망에서 강력한 모멘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나온 또 다른 숫자가 있습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전날 기준 대차거래 잔고가 159조 6346억 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습니다. 이달 들어서만 26조 원이 늘었습니다. 대차거래는 공매도의 선행지표입니다. 주식을 빌려서 하락에 베팅하는 자금이 역대 최대로 쌓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ETF 400조와 대차잔고 160조. 이 두 숫자는 같은 날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무관하지 않습니다.

성장의 그림자, 공매도 실탄

ETF 시장 400조가 단순히 지수 추종 자금만 끌어들인 것이 아닙니다. 거래소 데이터에 따르면 현재 ETF 전체 거래량의 약 90%는 레버리지와 인버스 상품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수 두 배를 추종하거나 하락에 베팅하는 상품들입니다.

순자산 400조 중에서 진짜 장기 투자로 볼 수 있는 자금이 얼마나 되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대표지수 ETF인 KODEX 200의 올해 순자산 증가액이 약 9조 6526억 원으로 가장 크지만, 그 바로 뒤를 잇는 상품들 중 단기 베팅성 자금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차잔고 급증은 이 흐름과 연결됩니다. 지난해 초만 해도 40~50조 원대였던 대차잔고는 지난해 9월 처음 100조 원을 넘었고, 올해 들어 추가로 48조 원이 쌓였습니다. 증시 호황 속에 고점 경계감을 느끼는 투자자들이 하락에 대비하는 포지션을 빠르게 늘리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공매도 잔액도 이달 들어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휴전 기간 종료를 앞두고 불확실성이 여전하고, 코스피가 전고점 6307까지 81포인트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차익 실현과 하락 헤지 수요가 동시에 커지고 있습니다.

ETF 시장이 커질수록 레버리지·인버스 자금이 함께 늘고, 그 자금이 대차거래를 통해 공매도 실탄으로 전환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400조라는 숫자 안에는 시장을 올리는 힘과 내리는 힘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전고점 81포인트, 두 가지 경로

이 역설이 언제 드러날지를 가늠할 수 있는 숫자가 하나 있습니다. 코스피 전고점 6307입니다. 오늘 6226에 마감한 코스피는 그 지점까지 81포인트 남았습니다.

전고점 돌파가 이뤄진다면, 신고가 모멘텀이 공매도 부담을 압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지수가 신고가를 경신할 때 쇼트커버링이 동반되며 상승 속도가 빨라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블랙록의 비중 확대 발표와 AI 반도체 업황 기대가 외국인 매수를 지속적으로 이끈다면, 대차잔고가 아직 공매도로 전환되기 전에 지수가 먼저 올라가는 시나리오도 가능합니다.

반대로 전고점 앞에서 지수가 저항을 받는다면, 쌓인 대차잔고가 일제히 공매도로 전환되는 압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달 들어 개인이 순매도로 돌아선 흐름도 눈에 띕니다. 외국인과 기관이 매수하는 동안 개인이 차익실현에 나서고 있고, 만약 외국인 매수가 주춤한다면 지지대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증거의 무게는 지금 당장은 상승 쪽에 조금 기울어져 있습니다. 종전 협상 낙관론이 지속되고 미국 S&P500과 나스닥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글로벌 위험 선호가 살아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유지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미·이란 협상이 실제 합의로 이어지는 것, 그리고 코스피 전고점 돌파 시 공매도가 일제히 커버링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 두 조건 중 하나라도 실망으로 끝난다면 160조 대차잔고는 가장 빠른 하락 압력이 됩니다.

내일 확인할 숫자는 하나입니다. 대차거래 잔고가 160조 원 위에서 계속 증가하는지, 아니면 줄어들기 시작하는지입니다. 잔고가 줄어든다면 공매도 포지션을 청산하는 쇼트커버링이 시작됐다는 신호이고, 반대라면 전고점 돌파를 믿지 않는 자금이 더 많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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