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F 400조|퇴직연금의 조용한 도착

· KRX

100일 만에 100조

오늘 국내 ETF 시장 순자산이 처음으로 400조 원을 넘겼습니다. 100조 원이 불어나는 데 걸린 시간은 딱 100일이었습니다. 코스피는 2.07% 올라 6091로 마감했고, 미국·이란 2차 협상 기대감이 증시 전반을 밀어올린 날이었습니다. 보도들은 이날의 분위기를 한결같이 "전쟁 이후 처음"이라는 말로 정리했습니다. 'SK하이닉스 이틀 연속 신고가', 'OCI홀딩스 스페이스X 계약 기대에 급등', 'ETF 순자산 400조 첫 돌파'. 같은 날에 나란히 놓인 세 줄입니다. 표면에서 보면 오늘 ETF 400조는 종전 기대감이 만든 숫자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물러서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입니다.

가속도가 바뀐 지점

국내 ETF 시장이 100조 원에 도달한 건 2023년 6월이었습니다. 다음 100조, 그러니까 200조까지는 706일이 걸렸습니다. 그다음 300조까지는 215일. 그리고 이번 400조까지는 100일이었습니다. 100조마다 걸린 시간이 706일, 215일, 100일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 가속도는 오늘 코스피 2% 반등이 설명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실제로 지난 두 달간 중동 전쟁으로 증시가 조정을 겪는 동안에도 ETF 시장으로의 자금 유입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퇴직연금 계좌, 정확히는 DC형과 IRP 계좌에서 ETF를 담는 비율이 꾸준히 높아진 덕분이었습니다. 증권업계는 지금 국내 퇴직연금에서 주식형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10%대라고 봅니다. 미국과 호주는 이 비중이 50%를 넘습니다. 격차는 40%포인트입니다. ETF 시장으로 아직 오지 않은 퇴직연금 자금이 그만큼 쌓여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400조는 전쟁이 끝나서 온 게 아닙니다. 전쟁이 한창인 동안에도 매달 조금씩 들어오던 퇴직연금 자금이 쌓인 결과입니다. 이달 들어 ETF 일평균 거래대금은 17조 원으로 지난해의 3배를 넘겼고, 국내주식형 ETF 순자산은 173조 원으로 해외주식형 108조 원을 처음 앞질렀습니다.

500조를 가르는 조건

이 흐름이 지속될 조건과 흔들릴 조건은 동시에 존재합니다. 지속 조건은 퇴직연금의 투자화입니다. 저축성 예금 위주였던 퇴직연금 운용이 ETF 중심으로 계속 이동한다면,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매달 일정 규모의 자금이 ETF로 유입됩니다. 퇴직연금 자금은 한번 유입되면 단기에 빠져나오지 않는 특성도 있습니다. 이것이 500조, 그 너머를 빠르게 당기는 동력입니다. 반면 흔들릴 조건도 명확합니다. 코스피가 다시 가파르게 조정받는다면, ETF 신규 유입 속도는 둔화될 수 있습니다. 특히 국내주식형 ETF 비중이 급속히 커진 지금, 지수 하락 구간에서 투자자들이 ETF를 어떻게 운용하는지가 시장 전체의 변동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유사 테마 ETF 난립 문제도 장기적 신뢰를 잠식할 수 있습니다. 내일 확인할 지표는 하나입니다. 4월 23일 SK하이닉스 실적 발표 이후 국내주식형 ETF로의 자금 흐름이 유지되는지입니다. 실적이 뒷받침되면 퇴직연금 자금의 ETF 편입 추세는 이어집니다. 실적이 기대에 못 미치면, 400조를 만든 두 번째 엔진, 그러니까 증시 활황의 지속성이 의심받기 시작합니다. 400조는 숫자지만 그 안에 두 개의 서로 다른 힘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코스피처럼 뜨겁고, 하나는 퇴직연금처럼 조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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